신라 천년사직의 한 서린 공주와 태자의 슬픈 얘기 스민 곳

▲ 망폭대에 세운 복원전의 남문모습 ⓒ최진연 기자

신령스러운 산봉우리, 우리나라에서 영봉으로 남겨진 산은 백두산과 월악산(1,097m)두 곳 뿐이다. 산세가 마치 누워있는 여성의 모습이다. 그 형태를 보고 싶다면 월악산 뒤쪽 수산리로 가보자. 휘영청 밝은 달과 어우러진 영봉은 영락없는 여성을 상징한다.

월악산음기는 무속에서도 이름났다. 하덕주사 앞뜰에 세운 4개의 남근석도 영봉의 기운을 막기 위해서다. 옛 사람들은 태양을 양(陽), 달을 음(陰으)로 불렀다. 즉 양은 남자, 음은 여자다. 음기가 넘치는 월악산에, 음양의 균형을 위해 남근석을 세웠다.

휴일이면 등산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월악산 송계계곡과 덕주골은 유명세가 붙었다. 하지만 이 골짜기를 한눈에 감시하는 18km의 대규모 산성이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더구나 정상으로 가는 덕주골 한 골짜기에만 내성·중성·하성 등 3겹의 성벽이, 송계계곡의 남쪽과 북쪽을 막아선 1겹의 외곽성이 쌓여진 곳은 국내서 덕주산성이 유일하다.

1곽의 내성은 덕주골 입구에서 2km 깊숙이 들어간 정상아래 있다. 상덕주사 앞 계곡을 막은 성벽은 붕괴된 채로 있었으나 2000년대 초에 복원했다. 내성둘레는 4km지만 성벽이 쌓인 구간은 650m에 불과하다. 험준한 산줄기와 자연암반들이 성벽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성문에서 왼쪽계곡에는 지금도 수문지가 남아있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약 340m 정도의 성벽이 잘 남아있다. 성벽위에는 빗물이 흐리지 않도록 처마처럼 덮은 원형의 갓돌과 여장, 총안도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성 안쪽은 경사를 따라 계단식으로 돌을 쌓아 올렸다.

내성을 지나면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가 지었다는 덕주사가 있다. 당시에는 큰 절이었다고 하나, 6.25 전쟁 때 그만 화재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의 극락보전은 새로 지었다.

▲ 중성 동문과 이어진 남쪽성벽 ⓒ최진연 기자

공주의 전설이 서려있는 14m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보물 406호)주변에는 탑 2기와 창건당시 규모를 짐작케 하는 기단석 등이 쓸쓸하게 뒹굴고 있다. 공주의 혼령이 이곳 어디쯤에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2곽으로 부르는 중성은 하덕주사 아래 있다. 동문을 사이에 두고 성벽이 남북으로 길게 들어 누웠다. 남쪽성벽은 바깥쪽만 옛 모습이고, 안쪽은 붕괴된 것을 계단식으로 복원한 했다.

성벽은 가파른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서 약 300m 정도 쌓았는데, 중간쯤에서 돌출된 치성도 볼 수 있다. 산성이 끝나는 지점에는 망을 볼 수 있도록 높게 성벽을 올렸다. 세 명의 병사가 근무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덕주골 입구가 한눈에 조망된다. 망대와 붙은 통로는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드나들었는지 바닥이 반질반질하게 달아있다.

동문과 맞물린 학소대는 탑을 쌓듯 층층의 바위가 암벽을 수놓았다. 학소대를 지나면 등산로가 없다. 위험한 구간이기 때문에 접근이 어렵다. 능선에 올라서면 망대와 여장, 총안이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있으며, 성벽은 2~3m 높이로 암벽과 암벽사이를 이었다.

이곳에도 남쪽성벽에서 본 돌출된 작은 치성이 원형으로 보존돼 있다. 북쪽 성벽은 월악산 영봉아래서 멈춘다. 그 이상은 천혜의 암벽이 자연성벽이 됐다. 특히 이 구간에는 망대를 많이 세웠는데, 남쪽의 하늘재와 산 아래 송계계곡 전체를 감시 할 수 있는 위치다.

▲ 수경대 위에 쌓은 하성 성벽 ⓒ최진연 기자

2곽의 중성에는 성벽과 어우러진 노송, 자연암반들이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었다. 산성의 고색 짙은 백미를 여기서 맛볼 수 있다. 또한 중성은 월광폭포의 계곡을 휘돌아 덕주골 전체를 가로막은 대규모의 산성이다. 둘레만도 7km가 넘는다. 하지만 성벽이 축성된 구간은 약 1.5km 정도다. 나머지 구간은 천혜의 암벽이 성벽구실을 했다.

3곽의 하성은 덕주골 입구 수경대 주변에 있다. 남쪽은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며, 계곡건너 북쪽의 가파른 능선부터 기암절벽과 빽빽한 노송사이로 2m 높이의 성벽이 쌓여 있는데, 풍광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수경대는 삼공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조금 올라가면 암반에 둘러싸인 거울처럼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 흐르는 곳이다. 신라는 이곳에 월악신사를 설치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덕주골은 절승만 있는 곳이 아니다. 고려 고종 43년(1256)몽고군이 2차로 충주를 공격했을 때 덕주골에서는 아비규환의 살육전이 있었다. 몽고병사들은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하고 말았다. 덕주골에는 세 곳에 성벽을 쌓았는데, 송계계곡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다. 이보다 더 큰 성벽은 송계계곡 남쪽 망폭대 인근에 있다. 2천년 전 신라가 영남에서 북으로 진출하기위해 뚫은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를 넘어 북으로 가는 도로주변에 쌓은 외성이다.

4곽으로 부르는 이성은 망폭대에 남문을 설치하고 북문은 송계계곡 끝부분에 세웠다. 북문은 훼손이 심해 최근에 보수를 했으며, 남문은 문루를 복원했다. 성벽은 남문과 연결된 말뫼산 능선까지 이어졌다.

▲ 내성에서 본 덕주공주의 마애불 ⓒ최진연 기자

월악산과 말뫼산 사이에는 크고 작은 골짜기들로 분포돼 있다. 덕주산성은 이 골짜기 4곳에 성벽을 쌓았다. 이중에서 동문이 있는 중성과 남북에 성문이 있는 외성은 조선후기에 다시 쌓았으며, 내성과 하성은 그보다 먼저 쌓은 성이지만, 초기축성 세력은 미스터리다.

신라는 월악산에 산성을 쌓고 산신에게 국태민안을 빌었다. 고려는 몽고가 쳐들어오자 백성들을 이곳에 피신시켜 란을 피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산성을 수호했지만 그 후 성은 퇴락돼 갔다. 신라 천년사직의 한 서린 덕주공주의 마애불과 그녀의 동생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대원지 미륵불의 슬픈 얘기, 덕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우리역사의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채 그 위용스럽던 모습은 간데없고, 쓸쓸한 모습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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