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저술에서 건축설계그룹까지"

▲ 동우건축에 모인 윤장섭家 3대

건축학계 유일의 학술원 회원인 소우(?愚) 윤장섭(尹張燮)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그의 제자가 아닌 건축인들은 대부분의 한국건축사를 처음 체계적으로 저술한 서울대 건축과 교수, 동 서양의 건축사 부문에 저술이 많은 분 정도로 기억하고 있으나, 그의 집안 3대가 건축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사실과 학문의 명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필자 또한 그러한 범주를 못 벗어났기에 취재하는 동안 몇 번이나 ‘놀람’을 경험하였다.

어린시절 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규칙적 생활
한국전쟁 후 피폐한 건축교육계를 주도한 윤장섭 교수는 1925년 서울에서  법관양성소 출신 윤병순 박사공의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남원윤씨 행임을 9대조로 하는 반상가의 자제로 태어난 그는  열세살에 아버지를  여윈 후 장학금을 타기 위해, 저녁 8시 반에 자고 12시 반에 일어나 4시간을 공부한 후 새벽기도를 위해 교회에 다녀온 다음 잠시 눈을 붙이고 남들과 같은 일상을 시작할 만큼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해 왔다. 일제의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공업전문학교에 다녔으며,  서울대 입시에서도 순수과학과 철학 그리고 건축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던 그는 이후에도 10년 주기로 건축에 대한 좌절감에 빠졌으며, 쉰 살이 되어서야 건축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MIT석사과정에서 한국건축에 눈 떠
윤장섭은 서울대를 졸업한 후 6.25를 맞아 공군장교로 5년간 복무하면서 소령으로 제대한다. 이후 잠시 한양공대에 재직하다 1956년 서울대로 옮긴 후 1990년 정년퇴임까지 35년간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사이 그는 군 재직 때부터 꿈 꾸던 미국 유학을 1958년 USOM의 주택사업 프로그램 미국파견 교육요원에 선발되어 MIT대학원에 청강생이 되었다.이는 5년제 건축과를 시행하는 미국의 건축교육제도 때문이었는데 첫학기 수강과목 모두 A학점을 받음으로 정식입학이 되었고, 성적이 우수하여 1년의 수학기간이 2년으로 늘어나 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서울대 전임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는 석사과정의 소득을 소우 수필집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MIT 건축과 석사과정에서 나 자신을 재평가 하며, 건축설계에 대한 중요한 기본원리들을 체득하였고, 건축문제를 해결하기위한접근방법을 배웠다. 디자인 원리는 시대와 장소 차이에 관계없이 변함이 없다. 다만 지역적인 조건, 기후, 사회의 관습, 가치관들과 계승되어온 문화적인 유산이 그들 자신의 건축 특성을 형성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미국에 유학 오기 전에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유산에는 무관심 했고, 서방세계로부터 모든 것을 차용해 보고자 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올바른 방법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현대건축의 발전방향은 우리 문화적 유산 속에 깊숙이 뿌리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가 왜 한국건축연구에 몰두했는지 그리고 동서양을 두루 섭렵하는 건축사의 대가가 되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 한국건축사를 비롯한 수많은 건축관련 저서들

한국건축사를 비롯한 25권의 저서들과 100여편의 논문
윤장섭 교수는 귀국 후 이러한 깨우침을 바탕으로 한국건축문화의 근원을 찾아 연구해나가는 일을 끈질기게 추진해 나갔고, 대만 성공(成功)대학 교환교수로 가서 그간 수집한 자료들을 분석정리하여 한국건축사연구 논문을 집필,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73년 이를 도판과 함께 풀어 쓴 것이 한국출판문화상에 빛나는 한국건축사가 되었다. 이 책은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25권의 저서와 5권의 역서를 갖고 있다.  위의 한국건축사를 비롯하여 서양건축사, 건축음향계획론, 건축계획연구, 서양근대건축사, 서양현대건축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이들은 한국과학기술도서상, 대한민국학술원상 등을 수상하는 등 좋은 결실을 맺었다. 또한 건축공간과 노자사상을 번역 출간함으로서 건축계에 노자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활동은 퇴임 이후 더욱 왕성하여 일본의 건축, 중국의 건축, 인도의 건축 등 동양건축 역사서를 저술하였고 100여편에 이르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국회의사당 밑그림, 서울대 관악캠퍼스 관여
이영희 희림회장, 홍대형·임창복교수 등 기라성 제자 지도

윤장섭은 교수시절, 이러한 저술활동 외에도 건설부 주관의 주거 및 도시주택연구실(1966년)에 이구 씨와 함께 참여하였고, 1966년에는 국회의사당 건립위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현 국회의사당의 밑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또한 1970년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마스터플랜을 건축과 교수들과 함께 기준안을 만들었는데, 신국범의 노고가 컸다. 그의 건축실무활동은 1960년 귀국 후부터 교수들의 겸직금지가 시행된 70년대 초까지의 10여년이다. 박동진과 함께한 기신건축연구소, 68년의 우현건축연구소를, 70년에는 하와이에 있는 박 어소시에이트와 협동하여 남산맨션아파트의 설계와 감리를 수행하였다. 특히 그는 MIT유학 직후 건축연구소를 이끌기도 했는데, 당시 홍성철, 최춘환, 서재웅, 이영희, 김용래 등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이영희의 희림과 합동하였으나 저술에 비해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노년에도 그는 이점을 아쉬워하나 이를 큰사위가 이뤄주었다. 또한 윤장섭 교수의 외가 7촌 조카인 정진수는 미국 시애틀의 와싱톤대학 건축과 출신으로 미국건축사(AIA)이며, 고려대 박사이고 현재 미군 극동공병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편 그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직접 논문을 지도했던 제자들도 많았다. 홍대형, 전영일, 임창복, 김정신, 이성관, 배시화 등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건축인들의 스승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정년까지 서울대에서만 총 88명 학생의 논문을 지도했다.

자녀교육 엄격, 소우가훈 만들어
윤교수댁의 내려오는 가훈은 ‘덕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절로 많은 복을 찾게되고(好德之人 自求多福)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가 넘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였다. 그는 이화여대 약대출신의 신경희 여사와 함께 2남2녀를 두었는데, 텔레비전을 다락에 두고 공부를 잘한 경우에 한하여 방학 때만 보게 하였는데, 자녀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할 정도로 가정교육이 철저하였다. 그는 직계자손을 위한 ‘소우가훈’을 만들었는데, 무위자연(無爲自然), 유순겸허(柔順謙虛) / 순진우졸(純眞愚拙), 이신득의(逍遙自適) / 숭신애인(崇神愛人), 이신득의(以信得意) / 언행경성(言行敬誠), 도통지락(道通至樂)으로 노장사상과 기독교 사상이 합일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말씀으로 가슴에 품고 산다. 

장녀 호서대 건축과 교수, 그녀의 스승 이경회는 부친의 제자
외손녀 미시건 석사 마친 시니어 아키텍

연세대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장녀 재옥은 동우건축의 강철구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출산한 후 모교 건축공학과에 편입, 만학으로 건축친환경공학을 전공, 박사 취득 후 일본 동경대에서 포스트 닥 과정을 이수하였다. MIT교환교수를 역임한 그는 지금 호서대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최근 LEED Ap를 획득하고 생태환경, 녹색환경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다. 그의 스승인 이경회 교수는 부친의 제자이기도하다.
큰사위 강철구 건축사는 연세대에서 학·석사,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종합건축을 거쳐 서울건축에서 건축가 김종성에게 실무를 익히고 30년 전에 (주)동우건축을 설립하여 현재 200명 가까운 조직의 수장으로 있다. 동우건축구룹은 건축설계 감리 인테리어 시공 빌딩관리 CM 등 건축의 연관분야를 소회사 체제로 운영하면서 건축주에게 일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진 시스템을 일찍이 도입하여  국내 톱 클래스의 사무소를 만들었으며 윤교수가 고문건축사로 있다.  그는 1990년도 호서대학교 건축학과를 개설하고 3년간 교수로 재임하기도 하였다. 호서대학교를 설립한 그의 부친 강석규 박사는 윤장섭 교수와 대학동기동창이며 현 총장 강일구는 그의 큰형이다.    
두 사람의 큰 딸 강지은은 버지니아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미시건대 건축학부에서 석사 후, 샌프란시스코의 유명설계회사인 KMD에 5년차 Senior Architect로 근무하고 있으며 사위 김현우는 보스톤 버클리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작곡가로 활동 중이다. 또한 차녀 강효은은 시카고의 CCC(Columbia College Chicago)미술학교 학사, 뉴욕 Pratt대에서 3D 애니매이션으로 석사를 마치고 뉴욕에서 3D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강철구의 누이동생인 한남대 대학원장이자 한국식품학회 회장인 강명희 교수의 장남 김찬우도 연세대를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주)동우건축에 근무 한 뒤에 하바드대학 GSD를 다니고 있다.

장남 재신은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손녀는 환경대학원에서 조경디자인 전공

장남 윤재신 교수는 서울공대 건축과에서 학 석사를 취득하고, 정림건축에서 2년간 근무했다. 이후 로타리 장학금으로 영국 스트라이스클라이대에서 CABD(Computer Aided Building Design) 분야를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MIT에서 주택설계 분야에서 석사, 건축설계 이론과 방법론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 후에 주택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한 바 있으며, 현재 이화여대 건축학과에 재직 중이다. 그의 장녀 윤효선은 뉴욕의 파슨스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 후 삼우건축에 재직하다가, 현재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조경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  윤재신 교수의 부인 이경림은 이화여대 제약학과 교수이다. 
차녀 윤재영 교수는 안산1대학 식품영양학과에 재직 중이며,  그의 남편 황병국은 독일 괴팅겐대 박사로써, 고려대 생명과학대학 교수인데, 장인과 사위가 현역 학술원 회원으로 있는  국내 유일 케이스이다.  그들의 장남 황준은 서울시립대 건축학과 5년차에 재학 중이다.
 차남인 윤재욱은 서울공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석사를, 미국 미시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외국어대 산업공학과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부인 최진영 교수는 하바드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재직 중이다.
이렇듯 윤교수 가족은 부인을 제외한 2남 2녀의 배우자까지 9명이 모두 국내외 유명대학 박사학위를 가졌으며, 강철구 회장을 제외한 8명이 대학 교수직을 갖고 있다.  가계의 학맥으로는 서울대(7명), 연세대(3명), 이화여대(3명), MIT(2명), 미시건대(2명), 하바드대(2명)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자라나는 손자들 중 얼마나 많은 박사나 건축사 또는 아티스트들이 나올지 모른다. 또한  인천지방법원장을 역임한 그의 형 윤종섭은  97세의 현역 변호사로서 다복함을 더하고 있다.
윤교수는 학창시절 건축공부를 하면서도 따로 선생님을 모셔 그림공부를 했을 정도였는데  자손들에게 그 재능이 이어져, 건축을 비롯한 디자인 분야에 일가를 이루고 있다.  새벽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미수가 가까운 지금도 부부가 함께하는 댄스 스포츠를 즐기는 윤장섭 교수 가문을 그가 백수연을 하는 날  다시 취재하고 싶어진다. 그 때는 얼마나 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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