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건축 태두의 맥을 잇는다"

▲ 건축을 업으로 하고 있는 장기인 선생의 후손들과 지인. 좌로부터 장필구, 장혜용, 최영집, 장순용, 박서홍, 김상환. ⓒ 손석원 기자

♦저술을 통해 한국건축의 기초를 다진 선친 장기인 張起仁
요즈음은 대부분의 교수들이 혼자 또는 연합으로 저서를 출판하여 강의의 교재로 쓰고 있으나, 5·16혁명을 전후한 시기의 대학 교재는 빈한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건축과 학생들은 건축구조학이나 건축시공학 중 단 한 과목이라도 장기인 선생의 저서를 교재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또한 실무에서도 한국표준시방서, 한국표준품셈, 건축적산학, 건축공사감독요령, 한국건축용어집 등 그가 초안하거나 집필한 책들을 건축사사무소든 시공회사든 근무처에 관계없이 항상 곁에 두어야 했다.

♦의주의 개명한 부잣집 아들-구조학, 16번 교정
그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장준섭과 김경원의 아들로 5남 5녀 중 일곱 번째로 1916년 태어났다. 장형이 일찍 죽어 실질적으로 장형이 된 기제(起弟)가 일본 와세다 대학 본과에서 영문학을 전공할 만큼 집안은 부자였고 개명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뛰어났던 그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고작 조가(造家)하는 공부냐”고 역정내는 아버지를 ‘큰 건물을 아름답게 설계하는 학문으로 단순히 집을 만드는 목수일이 아니라’는 뜻을 형이 상세하게 설명하여 드림으로 입학이 가능하였다. 기제는 귀국 후 고향에 머물며 외국의 연극관계를 번역하는 등 문학 활동을 하면서 국문학자 연극인들과 교류하였으나 공산당 치하에서 지주계급으로 몰려서 아오지탄광에서 사망했다는 것을 풍문으로만 들었다고 한다.
동생 장기욱(張起昱)은 독문학을 전공하고 연세대에서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 후 근년에 작고하였다.

♦사무소 위해 교수직 사양, 아들 건축사 시험 땐 출제위원도
장기인 선생은 1938년 경성고등공업학교(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를 졸업한 후 해방 당시 조선공영회사 건축과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1946년 경기공업고등학교 건축과 교사로 출발한 교육의 길은 1959년 한양대학교를 시점으로 중앙대, 홍익대, 단국대, 고려대, 동국대 등 많은 대학들에 출강하여 후학을 길러 왔으며 1965년도에는 삼성건축사무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는 건축사사무소와 교수직을 병행할 수 없다며, 많은 대학의 교수 초빙에 응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교수들의 비공식적이 사무소 운영과 대조되는 결단이었다.
장순용은 “스스로 건축사 시험을 보기위해 공부하고 있는데 출제위원 위촉을 받아 섭섭해 하셨으며, 아들이 건축사 시험을 치를 때에는 출제위원 자리도 사양하는 등, 꾸준히 한 우물을 파는 자세로 일하는 것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셨다”며, “설날에도 세배 받은 후면 곧 바로 서재로 가는 등 선친께서는 평생을 집필에 몰두하셨고, 올곧은 선비적 생활을 하셨는데, 선친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성장해 왔다”고 술회했다. 이는 교수자리를 사양하면서도 어느 교수보다 많은 대학교재를 저술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창호, 벽돌, 단청, 한국건축사전, 목조, 개와, 석조, 재료로 전통건축분야까지 아우른 한국건축학대계 8권을 저술함으로서 이 땅에 체계화 된 건축총서를 최초로 발간하는 업적을 쌓았다.

▲ 장기인 선생이 생전에 집필한 서적들. 과거 건축 전문서적이 부족한 5·16전후 시기에 대부분 건축과 학생들은 이 책으로 수업을 했다.

♦한국건축대계 등 저술, 전통건축 체계화에 공헌
아들 장순용은 “부친께서 동서양 건축을 포함하는 건축사전을 9권으로 하는 초고를 탈고하셨으나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타계하셨다”면서 유고를 정리해서 출간하는 것이 아들에게 부여된 임무인데 교정 작업이 여의치 않아 출간이 지연되고 있다고 송구스러워 했다.
누님의 아들인 생질 김상환은 한양대학교 건축과에 입학한 후 그의 저술을 도왔는데, 건축구조학의 경우 16번에 걸친 교정 작업으로 완벽을 기했으며, 덕분에 장선생으로부터 “구조학강의를 왜 듣느냐”는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장기인 선생은 건축사자격 심사위원을 비롯하여 많은 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1967년에는 제2대 대한건축사협회 회장직에 취임하였는데 그의 사위인 최영집 건축사가 2009년에 장인에 이어 제28대 회장에 취임하고 있어 대한건축사협회 사상 초유의 대를 이은 회장이 탄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도산서원, 행주산성, 칠백의총, 수원성 등 문화재를 보수복원하거나 정화하는 설계를 통해 한국의 전통건축을 되살리고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하였으며, 한국건축문화대상(1992)를 비롯 서울시문화상, 대한건축학회상, 대한건축사협회상, 대통령표창 등을 수상하였다.

▲ 삼성건축사사무소 장순용家가 참여했던 한옥 건축작품들 <제공=삼성건축>

♦삼성건축사사무소 대 이은 장남 장순용
장기인 선생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대를 이은 것은 장남 순용이다. 그는 194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고를 거쳐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하여 선친의 강의를 듣고 배우게 된다. 졸업 후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1973년에 제대하였는데 당시에 취직이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으며, 설계사무소에 이력서를 내면 이력서에 적힌 부친의 함자를 보고는 “왜 이곳에 들어오려 하느냐”며 받아주는 설계사무소가 없었다. 부친께 이런 정황을 말씀드렸더니 선친이 운영하시는 삼성건축사사무소에 취직하게 되었다. 부친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이 싫어서 다른 설계사무소에 들어가려 하였지만 결국은 선친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다.

♦부친 명성 때문에 건축사무소 취직 안 돼
당시에는 한국의 전통에 대해서는 가르치는 대학교도 없었고 ‘한국건축사’라는 과목은 있지도 않았는데 선친께서 여유기 생기면 한국건축을 조사하는 답사일정을 간혹 만들어 실측을 하고 도면을 그리는 일을 배우게 되었으며, 당시에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키는대로 일을 하게 되면서 한국건축에 대하여 어렴풋한 감을 가지게는 되었지만 체계적인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경탄의 대상으로 한국건축을 접하게 되었다. 서원, 향교, 민가, 궁궐, 관아, 성곽 등을 답사하면서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건축사사무소에 다니던 중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 입학하여 도시계획을 공부하였고, 졸업논문으로 「신라왕경의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신라시대 경주의 가로계획과 배치에 관해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부친 와병, 기사 직분으로 사무소 운영
대학원 졸업 후 얼마 아니 되어 부친이 뇌출혈로 입원하시게 되면서 부득이하게 설계사무소의 기사로 근무하다가 사무실 경영을 맡게 되면서 수주를 위하여 관청에 찾아가서 설계일을 따오기 위해 활동하면서 세상이 어렵다는 것과 생존경쟁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관청의 담당자와 상급자에게 계약할 때, 준공계를 제출할 때, 수금할 때의 좋게 말해서 로비활동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이렇게 벌어먹고 산다는 것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마음속에는 로비가 아닌 실력을 키워서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1983년에 건축사자격을 취득하고 동년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전신)에서 치르는 문화재실측설계 기술자 시험을 보고 자격을 취득, 1985년에는 부친과 함께 공동대표자로 사무실을 등록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만 하여도 일반건축과 한국건축을 겸하여 설계 일을 하였는데 사무실 직원들을 일반건축과 전통건축을 원활하게 다루는 직원을 구하기 어려워 업무를 분리하여 담당하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수주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고, 일반건축 쪽에서는 삼성건축은 문화재를 다루는 사무실이라는 역선전을 하여 일반건축의 수주가 점차 어렵게 되자 결단하여 전통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사무실로 변환하게 되었다.

♦전통건축으로 이미지 굳어져 현대건축은 포기
그는 1991년부터 경기대, 서울대, 한양대, 명지대, 목원대의 대학원에 출강하여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사)한국역사학회 회장(2008∼9)을 역임하였고, 대한건축학회 특별상(남파상)을 수상하였다.
장순용건축사는 기자에게 “수많은 문화재 보수 실측을 하면서 가장 보람있게 생각하는 것이 남대문 실측조사보고서”라고 하였다. 화재 발생 꼭 1년 전에 보고서를 냈다면서 만약 이 보고서가 없었다면 어떻게 복원했을지 아찔하다고 했다. 그는 제대로 복원하지 않을 바에야 그대로 두는 것이 났다는 기자의 툇마루한담 내용을 듣고, 운현궁 실측조사 때 벽에서 떼어낸 벽지(사진)를 보여주었다. 고종 즉위 후 운현궁이 만들어졌는데 조사 당시에는 수많은 세대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혹시 바탕에 왕실벽지가 있을지 모른다는 가정 하에 그간 겹겹이 도배된 벽지를 조심스럽게 제거하자 본래의 왕실벽지가 화려한 금박을 머금고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간 보수과정이 제대로 안 돼 지금 경복궁 등 어디에도 이러한 왕실 벽지가 없다면서 보수기술자의 감리업 진출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었다.

♦아들 필구(弼求)도 전통건축 박사과정
아들 필구는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설계사무소에 근무하다가 결혼 후,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있다.「영희전의 변천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하면서 한국건축으로 전공을 선택하였으나, 아직은 건축사와 문화재 실측설계 자격증 취득을 준비해야하는 등 수련에 힘써야 하는지라, 진로는 아직 가다듬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건축을 전공으로 택하고 있기에, 학교든 실무든 전통건축이 3대째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매제는 최영집 건축사, 내종 김상환도 건축사
장기인 선생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째 딸 혜용은 서울대에서「한국의 단청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취득 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부친을 닮아 그림을 잘 그렸던 혜용은 중국의 단청을 모은 6권을 모두 복사하는 등 아버지를 도왔다. 따라서 논문도 동양화 전공도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는데, 동양전통의 5방색을 주조로 하는 성공한 화가로서 청주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 대한건축사협회 회장인 최영집 건축사가 남편이다. 최영집 건축사 또한 장기인선생의 제자로서 탑건축을 운영하면서 한국건축계에 좋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아들 최도빈이 서울대에서 미학을, 뉴욕주립대에서 철학을 전공하였으며, 딸 최예빈이 동양화를 전공하고 있다.
앞서 서술한 생질 김상환은 건축사와 건축구조기술사로서 현재 대도종합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주)건축사사무소 한국종합건축의 전상백 건축사는 장순용의 외사촌이 되며, 그 아들 전병규도 건축을 전공하고 있다.
제자이며 삼성건축사사무소에 근무하였던 박서홍건축사는 “김중업 김수근의 부여박물관의 왜색 시비가 장선생이 전통건축에 매진하는 기폭제가 되었다”면서, “해방 직후 발간한 한국건축용어집의 편찬은 최대의 업적”이라고 했다. 해방 후 혼돈 속의 한국건축계가 당면한 교육과 실무 그리고 전통건축에 걸친 다양한 저술과 수많은 제자의 양성 그리고 건축학회, 건축가협회, 건축사협회 등 범 건축계를 이끈 선대 장기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오직 전통건축만으로 사무소를 운영하는 2대 장순용 그리고 상아탑과 가업승계 중 하나를 택해야하는 박사과정의 3세, 또한 이들과 호흡을 함께하는 건축계의 기라성 같은 친인척들이 있어 명가의 명성은 더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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