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묵은 구렁이가 산성 지킴이

▲ 고성산성제를 준비하는 마을 부인 ⓒ최진연 기자

이름 없는 옛 성
신라의 성인가 고구려의 성인가
성벽은 높고 웅장한데
석축만이 오랜 역사 간직 했네
천봉만학(千峯萬壑)둘렀고
장강이 에웠으니
일부당관의 요새지에
난공불락의 철벽성일세
영남 길 구레기 고개
하늘높이 솟았고
관북 가는 뱃나루 남한강이 창일 하네
반도를 경영하는 자 먼저 한수를
차지하여야 하네
활 쏘고 창 쓰던 그날이 언제던가
한낮의 닭 울음소리 만이 평화롭기만 하네.

상기시는 정선군지에 나와 있는 고성 음(吟)의 한 구절이다.
정선 예미에서 고성리가는 길은 첩첩산중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 고개를 지나면 흑백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오지마을의 풍경이 펼쳐진다. 고성리에는 아득한 옛날에 쌓은 산성이 있어 지명까지 고성리가 됐다. 고성리는 정선 임계서 시작된 남한강이 아우라지를 지나 조양강과 동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곳이다. 남한강은 삼국시대부터 병사들이 이동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리고1970년대 초순까지는 정선지역에서 벌채된 뗏목을 마포나루까지 운반했던 뗏군들의 애환이 담긴 추억의 물길이기도 하다.

▲ 성벽아래로 동강이 내려다보인다. ⓒ최진연 기자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동강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에 고성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고구려의 옛터로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산성 대부분이 그러듯이 어느 세력이 처음 산성을 쌓았는지는 기록이 전무하다. 다만 성안에서 청동기시대의 마제석검과 석촉, 토기가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산성으로서 기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있다. 부족국가 때의 산성은 나무기둥을 세운 목책성과 흙으로 쌓아올린 토성이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산성아래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집터들의 흔적이 남아있어 오래전부터 동강주변에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1997년부터 정선군에서는 국고지원을 받아 다섯 번에 걸쳐 고성산성을 발굴조사 했는데, 수습된 유물 대다수가 신라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 현존하는 성벽도 신라의 축성술에 가깝다. 정리를 해보면 고성산성은 삼국시대 이전에 산성으로 이용했으며, 고구려와 신라가 영토쟁탈로 대치할 때 신라가 석축으로 쌓아 고려시대까지 이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남한강일대는 신라시대 산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산성아래 고성리 마을을 거너는 나룻배 ⓒ최진연 기자

고성산성은 고성산(425m)정상을 감싼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쌓은 성)석축산성으로 영월에서 정선, 정선에서 신동을 거쳐 태백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된다.

산성규모는 둘레가 약 700m이며, 성벽은 연결해 쌓지 않고 적이 쉽게 침입할 수 있는 산등성이에만 네 곳에 성벽을 쌓은 특이한 형태다. 성벽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5m전후로, 성벽상부의 폭도 5m에 이른다.

성벽은 대부분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으며 그중에서도 남쪽과 서북쪽, 동북쪽에 잘 남아있다. 특히 서북쪽 성벽안쪽에는 계단식으로 쌓아 당시의 축성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성벽바깥은 경사지로서 붕괴방지를 위해 계단식 보축성벽을 쌓기도 했다.

남쪽의 치성도 길이 12m, 하단넓이 9m, 상단은 4m에 이른다. 이곳에도 성벽바깥으로 보축성벽이 쌓여있는데 신라의 축조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성문은 성벽과 성벽사이의 빈 공간들이 문터로 추정된다. 성내부에는 건물터로 보이는 너른 평탄지가 두 곳에 있다.

성안에서 가장 높은 서쪽에는 둥근 구덩이와 네모난 석축시설이 있는데, 쌓은 형태로 볼 때 봉수대로 추정된다. 마을사람들은 맞은편에 위치한 칠목령산성의 봉수와 횃불을 주고받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주민들 사이에는 옛 부터 짚단만한 구렁이가 가끔 산성에 나타나는데, 천년은 묵었다고 했다. 그들은 구렁이가 산성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믿고 있다.

▲ 산성아래로 흐르는 동강의 맑은 물 ⓒ최진연 기자

정선 땅은 어딜 가도 한국적인 정서가 많이 남아있어, 우리자연과 우리역사가 오롯이 배어 있는 인문학의 고장으로 부른다. 특히 매년가을 고성리 주민들은 산성제를 지내며 오지마을 의 시름을 달랜다. 산성제가 열리게 된 동기가 기자와 참 인연이 깊다. 1989년 정선지역 산성을 취재할 때다. 고성리 주민들은 영월 거운리(만지)에 댐이 들어서면 조상대대로 살아온 터를 떠나야 할 처지에 놓였다. 고성리가 수몰되면 애지중지(愛之重之)하던 산성도 갈 수 없게 된다.

고향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산성보존차원에서 기자는 산성제를 열어 댐 방지 여론을 조성하면 어떨까하는 견해를 밝혔다. 고성리 사람들은 산성제추진을 위해 석동근 이장을 비롯해 많은 주민들이 똘똘 뭉쳤다. 경비를 마련하고 문화재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드디어 1992년 10월, 산성제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올해가 23회째가 된다. 다행히 댐건설은 취소됐으며 고성산성과 동강은 이제 널리 알려졌다. 그렇게 고성산성은 도기념물 68호가 되었으며, 관관자원으로서 다시 살아나게 됐다.

산성 가는 길은 고성분교 옆 주차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20분정도 올라가면 도착할 수 있다.
성벽에 올라 도도히 흐르는 동강을 내려다보면 막힌 가슴이 탁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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