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연휴를 틈 타 북경에 다녀왔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수준이 이미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갈 때 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거대한 도시의 모습에 다시금 놀라고는 한다. 싼 인건비와 그것으로 인한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던 나라가 언제 이렇게 커지고 발전했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하기도 하면서도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자본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것으로 포장된 현대화와 자본주의적 시민의식이 오히려 사회주의로 무장한 중국이라는 나라 속에서도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민들은 생각보다 충분히 자유로우며 국가는 적당히 간섭적이고 혹은 충분히 강제적인 자세로 ‘경제부국’이라는 큰 그림 하나만을 완성하기 위해 방임인 듯 방임이 아닌 방임을 견지하고 있다.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바뀌는 디지털 중국의 얼굴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지는 않는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지켜야하고 지녀야 할 가치나 전통에 대해서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구정에 해당하는 춘절(春節)에 대한 태도이다. 고향 천리 멀다 않고 귀성전쟁이 치러지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고 섣달 그믐날부터 가족이 모여 만두를 빚으면서 지내는 수세(守歲)부터 시작하여 짧게는 며칠 길게는 보름 이상 계속되는 그들의 축제는 이미 특별하거나 형식적인 명절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복(福)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생각으로 대문 위에 복이라는 글자를 거꾸로 붙여두는 풍습은 너무나 아날로그적이어서 오히려 귀엽기까지 하다. 그런가 하면 집 안팎의 잡귀를 쫒는답시고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시도 때도 없이 이곳저곳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는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짜증나기도 한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싶은데 누구 하나 불만도 없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권리를 중요시 여기는 요즘 세상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아날로그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야 그저 풍습이나 전통으로 여기면 그만이고 그 정도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있으니 그리 부러운 일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북경에서 우연히 보게 된 TV 프로그램 하나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날로그적 추억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감동중국(感動中國)’이라는 중국 중앙방송(CCTV)의 프로그램이었다.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으나 중국 전역의 감동적인 인물에 대한 인터넷 투표 결과 10명 정도를 선정하여 표창하는 방송이라 한다. 방송 시기가 2월 달이어서 대략 춘절과 일치하는데 즐겁게 웃고 떠드는 수많은 춘절 오락 프로그램과는 달리 뭔가 숙연해지는 방송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방송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중국이라는 나라에 감동을 준 사람을 선정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송 포맷 또한 간단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수장자로 선정된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이, 그들의 철학이 정말로 감동적이며 아날로그적이다. 올해에는 첨단 컴퓨터도 없이 계산기로 원자폭탄을 설계한 창의적인 사람부터 한 평생 오지의 학생들을 지도해 온 선생님, 병든 아버지를 십 수 년 수발하고 있는 딸, 자신은 어렵게 살면서도 매달 기부를 하는 평범한 촌부, 30년 이상 장애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수 십 년 동안 봉사해 온 단체 등 우리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매년 그러하다고 한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휘황찬란한 표창이나 훈장이 아니다. 무언가를 잘 해서 주는 상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그 일이,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일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고마움의 표시이다. 상을 받는 그들도 어색해 할 뿐, 뻐기거나 뽐내는 법이 없다. 그들이 과학자이건, 선생님이건, 효부효녀이건 촌부이건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그들의 표정은 상을 받기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 사실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이 애국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민족정신과 민족단결을 증진하고 사회 안정을 수호한다는 식의 촌스러운 감상주의를 피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같은 시대와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의 냄새를 맡는 일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냄새로 우리는 공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으며 그래서 같이 울고 웃고 때로는 반성하거나 가슴 벅찬 흥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이미 감동이라는 것은 공감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 같은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공유하며 그것이 마음을 움직일 때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를 알고 있는 셈이다. 어찌 보면 직설적이고 강요적이며 낯간지럽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공감이라는 것과 감동이라는 것은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한 나라를 국가로 만들고 더 큰 세계적 존재로 만드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우리에게도 이런 존재가 없을 리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부터 감동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고 있다. 공감할 대상도 그다지 없다. 다들 그들만의 리그에 몰두할 뿐 도무지 공감이라는 단어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길도 없다. 하루하루 살기 바쁜 우리에게 공감이라는 것은 정말 사치일까. 그리고 말초적이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감동이라는 단어도 이제는 영영 우리 옆에서 사라지는 것일까.

새삼 사람 사는 냄새라는 것이 그립다. 그것이 아날로그적 감동일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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