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중반 이후 원나라와 소통하면서, 화엄종은 신앙형태가 차츰 신비적인 영험과 공덕만을 강조하는 밀교 계통으로 변모하여(중국 오대산 계열), 신비적 성격이 강한 원나라 라마불교의 말폐적 영향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왕실의 원찰’이라고 하여 장대하고 화려한 사찰이 남설되고 반승이 과다하게 증가했으며, 도승의 세속화는 더욱 심해져서 불교의 정신적 지도력까지 흐려지게 되었다.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어감에 따라 신앙결사(지눌의 정혜결사, 요세의 백련결사 등) 단계에서 구축된 소수의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적 기반이, 지방사회의 향리층, 독서층을 중심으로(원나라 간섭기 이후 원 유학생을 중심으로 수입된) 성리학에 사상사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이 같은 사회적 모순과 불교계의 문제점을 개혁하려는 의지는 여러 갈래로 파악되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성리학의 도학정치와 비슷한 백장청규식 방식으로 성리학에 대립하여 선에 편중되었다가(조선 초) 다시 조선중기에는 화엄이 부흥하여 균형을 찾는다. 이것이 려말선초 불교철학사의 단편인데 이 같은 철학이 불탑에 어떻게 표현되고 변천되었는지, 사진으로 살펴보자.

▲ 공주 마곡사 5층석탑(문화재청)

공주 마곡사 7층석탑은 탑 꼭대기 상륜부에 라마교의 청동 복발을 그대로 덮고 있어서, 원나라에서 보내온 복발을 우리나라 전통적 5층탑의 상륜부에 그대로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복발은 우리나라의 상륜부보다는 커서 비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존의 석탑 위에 억지로 올려 세웠는지도 모르겠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다층석탑은 원의 라마불교식 밀교적 영향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월정사 9층석탑은 기본적으로 처마곡은 유가종 3층석탑과 비슷하지만, 평면이 8각이고 다층이라는 점이 전혀 다르다. 이때는 상업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에 탑이 대단히 화려하고 아름답다. (오대산 월정사는 중국 오대산을 모범으로 하기 때문에 밀교계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탑 앞에는 기도하는 불보살이 있는데, 모습이 원나라 불상에서도 찾아지는 유형이다.

이런 종류의 석탑은 지금 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 탑골공원의 원각사 10층석탑 등, 전국에 별로 많지는 않지만, 사실적 표현으로 제법 남아 있다. 수종사 탑은 원각사 탑을 모각한 것인데 탑 안에 모셔졌던 불구가 얼마 전 해체 복원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 수종사 8각5층 석탑(문화재청)

여주 신륵사의 석탑도 대리석으로 조성되어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조금 다른 형식이지만 모두 같은 (장식적이고 화려미를 자랑하는) 유형으로 분류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조선조 최대의 선문인 양주 회암사 회주 나옹혜근이 이곳에서 열반하여 그의 계단이 이곳에 조성되었는데, 그의 조사탑은 이와 전혀 다른 미감을 보인다. 백장청규식 미학으로 도학파와 비슷한, 모든 장식을 배제하는 단순한 형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탑 앞에 놓인 석등은 아라비아 풍의 뾰쪽 아치를 시설한, 대단히 장식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의 제자들이 나옹혜근의 철학을 모독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당시의 미학이 모두들 그렇게 화려한 것을 추구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자. 어디에나 높은 곳에는 고려말처럼 십자가가 아고라의 언덕을 넘어가고

▲ 신륵사 다층석탑(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길거리에는 포장마차까지 점치는 집으로 넘쳐난다. 심지어 카페에서조차 점을 친다고 난리이니, 우리나라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삶에 대해 불안하면 그럴까-- 이런 난세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빛(철학)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도학자들이 주장하는, “정치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바로 먹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사회의 최대 관심사는 물가의 폭등, 부의 편중 등인데 이에 대한 대책은 ‘포플리즘’이라고 매도하면서, 뾰쪽한 대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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