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암사 3층 석탑(빛깔있는 책들-석탑, 정영호 외, 1993)-드물게 상륜부가 남아 있다

지방 분권형 호족국가인 신라말 구산선문의 개산은, 중앙 집권적 귀족국가인 고려 초까지 이어진다. (마지막은 수미산문, 황해 해주 - 당시는 신라의 변두리) 신라 말 도헌의 희양산문(문경)은 봉암사에 기와로 4기둥을 세우고 철불 2구를 주조하여 지세를 누르고 지키게 했는데 (도선 당시로서 비보사탑설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3대조 극양은 고려 태조를 찾아뵈었으며, 정종은 화엄경 8질을, 광종은 증공대사라고 시호를 내렸다. 말하자면 경주 계의 구산선문임을 말해 준다. 봉암사 석탑을 보면 유가계 3층석탑의 기본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다만 2단의 기단을 간략화한 점이 다르다.

그렇지만 후삼국이 성립한 이후에는 잠시, 현재의 고통을 덜어주는 미래의 부처로서 미륵불이 나타나고, 이를 뒷받침하는 종파로서 백제 때 유행했던 삼론종이 재등장하면서 미륵불이 조성된다. 이때 미륵불의 대표적 소조상은 논산의 은진미륵(관촉사 미륵보살입상)과 후대에 중창되긴 했지만 진표의 금산사 미륵전 흙불상 등이 있다.

후백제(892∼936)의 견훤은 백제 유민들의 향수를 달래면서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해, 교리에 융통성을 보이는 원효계 (남악파-지리산 화엄사) 화엄을 선양하게 되며 고려 2대 혜종(나주 오씨의 아들)때까지 백제 고토에는 백제계 석탑이 조성된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은 백제 쪽 석공이 빚은 듯 신라의 유가종 3층 석탑의 비례치(분수)와는 전혀 다른 백제계 분수(分數)의 미감을 보인다. 옥개석이 판석으로 떨어지고 받침돌은 별개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이런 수법은 목구조식인 듯 하면서도 신라 쪽 모전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부여 장하리 3층 석탑은 부여 쪽 백제계 석공이 다듬은 것으로서 당시 유행했던 선종의 3층 석탑을 받아들였지만 비례미(분수)는 유가종의 삼층석탑과 달라서 백제식이라고 알려졌다.

▲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문화재청)

공주 계룡산에 있는 갑사의 남매탑은, 뒤쪽이 7층이고 앞쪽은 5층(현 4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의 것은 구법이 정림사지 5층 석탑과 유사해서 백제계 석탑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놓인 위치나 2개의 탑이 붙어서 배치된 점 등이 가람 안에 있는 석탑이라고 보기 보다는, 조사의 사리탑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조사의 사리탑도 초기에는 불탑하고 거의 같은 양식으로 출발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정림사지 5층 석탑 조차도 혹시 고려 초의 작품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있지만 여기에는 백제를 멸망시켰던 소정방의 평제(平濟)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건축년대가 확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발굴 결과에 의하면 석탑이 건립되기 이전에 이미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서, 그 기록조차도 후대에 조작된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조형으로 정읍 은선리 3층 석탑이 있는데, 탑신이 길고 옥개석이 판석 형태로 전돌처럼 올려졌다. 그 구법은 모전석탑처럼 보이지만 비례미는 독특해서 마치 백제계 석탑처럼 보인다. 백제계의 삼론종이라기보다는 라말여초에 유행했던 밀교계 사찰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밀교에 대해서는 별도로 이야기를 해야겠다)

▲ 예천 개심사지 5층 석탑(빛깔있는 책들-석탑, 정영호 외, 1993)

예천 개심사지 5층 석탑은 경주 쪽 석공이 다듬은 것으로서 신라 쪽 유가계 삼층석탑의 조형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세부에 약간의 변화를 보인다. 기단부와 1층 탑신부에 불보살의 입상이 새겨진 것으로 봐서 원효계 화엄종파인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남악파 화엄이면서도 사찰의 경제적 인연에 따라 신라 쪽 석공을 불러다 쓰면 유가종의 삼층 조형을 따르게 되고, 백제 쪽 석공을 불러다 쓰면 그쪽의 조형 분수(비례미)가 된다는 것이다.

고려 4대 광종은(재위 949∼975) 경주계(모친)로서 병약한 동복형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은 뒤, 의상계 (북악파-태백산 부석사) 화엄의 균여에게 명하여 후백제를 밀었던 원효계 남악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게 한다. 이것이 의상계에 의한 원효의 폄하운동이다. 이에 대해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속장경에서 의상을 빼고 원효를 높이 칭송하고 있다. 그는 화엄종을 혁신하면서 선교(禪敎)를 아우르는 천태종을 개립하여, 모든 선문이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일세를 풍미하지만 남쪽에는 순천 선암사만이 천태종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세워진 3층 석탑은 쌍탑으로 유가종 사찰의 것과 너무 같아서, 개성에 있다는 국청사의 모습을 보기 전에는 그의 미학을 알 수 없다. 그가 개성에 돌아가기 전에 머물었다는 해인사에는 지금 3층 석탑 1기가 대웅전 앞에 어울리지 않게 외롭게 서 있는데 이것이 어느 시기에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해인사는 의상계 신림의 제자 순응과 이정이 애장왕 3년(802)에 왕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시되었는 바, 의천은 이곳에 머물면서 화엄이 유가계를 제치고 귀족불교로 변질했던 모습의 화엄종을 혁신하려고 했던 것이다.

왕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천태종에 맞서 굴산산문의 지눌(1158∼1210)은 정혜결사(선)를 영천의 거조사 (지금은 은혜사 거조암)에서 시작하여 순천 송광사에서 꽃을 피웠는데,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요세(1163∼1245)는 백련결사(민중불교-천태종)를 그 옆 고을 강진 백련사에서 병립시킨다. 이에 대해 가지산문의 보각국사 일연스님은 운문사에서 목우자(지눌)의 맥을 잇게 되었으며, 말년에는 인각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짓고 경상도(송광사와 다른 좌도)를 중심으로 사찰을 정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석탑이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아서 고려의 선종에서는 의상계 화엄과 마찬가지로 석탑을 조성하지 않고 대신 조사탑인 부도만 조성되었음을 본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좌도(경상)와 우도(호남)의 철학과 미학이 전혀 다르다. 좌도는 한나라당이 차지하고 있고 우도는 민주당이 절대 우세하다. 대통령이 어느 쪽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 출세하는 사람들도 달라진다.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지역 간 생각을 다르게 하는 걸까? 아니면 풍수지리적(?) 조건 때문일까? 이것이 천년 이상을 지나고 있으니--나가수(?) 아닌, 나꺽정이다. 이것을 타파할 수 있는 조건은 오직 바른 (건축)역사 교육만이 유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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