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 가면 가장 유명한 것 중에 하나가 중앙탑(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제6호)이다. 그 높이도 그렇고 그 당당한 모습도 그렇고, 시원한 남한강 가의 높은 둔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우리를 압도한다. 왜 너른 평야를 놔두고 아무리 상징성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하필이면 이런 적막강산에 세웠을까? 그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도 없고 해서, 1993년 중원 탑평리 유적에 대해 발굴을 했다. 어디서 흘러 왔는지 몇 점의 기와 편은 수습되었지만 단 하나의 건물터도 발견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것은 절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조형물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유의 탑들을 많이 본다.
여주 신륵사에 가면 가람 경내 마당 가운데에 아름다운 고려 때의 석탑이 하나 있고, 별도로 떨어져서 남한강 가 바위 위에 전탑이 외롭게 서 있다. 물론 중간에 한번은 해체 보수한 흔적이 보이므로 원 위치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도 들 수 있지만, 틀림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특이한 전탑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보면 이것이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남한강의 급한 물줄기가 꺾어지는 자리 상하의 물 흐름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리에 탑을 세운 것이다. 바라기 탑, 망탑인 것이다.(앞의 두 단어는 사전에 명기되어 있지 않다) 이 자리에 서서 물의 흐름을 살폈을 수도 있고 남한강을 따라 내려오거나 올라오는 배들의 등대가 되기도 했을 터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낙동강 가에 서 있는 엉뚱한 안동 법흥동 7층 전탑(국보 제16호)도 이해가 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가에 이렇게 높은 전탑에 걸 맞는 가람을 세우려면 얼마나 큰 사찰일까 하고 추정도 해 봤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 탑인 것이다. 절집과 별도로 지어진 바라기 탑인 것이다. 법흥사라는 사찰 이름이 전해지지만 아마도 절터는 이 탑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을 것이다.
이러고 보니 의성탑리의 5층 석탑(국보 제77호)은 너른 평지에 혼자 우뚝 서 있다. 주변보다 조금 높은 둔덕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변 절터가 깎여졌을까 하고 의심할 수 있지만, 그 보다는 이것이 평지 망탑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심증이 간다. 기둥은 강한 흘림을 가지고 있고 지붕의 모습은 전탑의 형식을 모방하고 있다. 이 점 더욱 연구를 해야 할 부분이다.
이와 반대로 산등성이 바위 위에 앉혀진 석탑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경주 남산 용장사곡 3층 석탑인데 (보물 제186호) 산골짜기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우뚝 서 있다. 보통은 기단이 2단인데 여기는 단층으로 생략하고 있고 옥개석 받침도 통상 5단인데 여기서는 4단씩으로 줄이고 있다. 말하자면 아래쪽에서 볼 때 적절한 비례치를 가질 수 있도록 고려한 것으로 전형적인 바라기 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제주에서는 절터의 석탑 말고 탑이라 불리는 조형물이 있는데 ‘방사탑(防邪塔)’이라고 하며 그 모양이 특이하기 때문에 현대의 조형물에서도 많이 응용하는 탑이다. 육지에서 말하는 성황당 탑과 유사한데 이와 비슷한 계단식 석탑들도 예전에는 많이 조성되었음을 본다.
우리나라의 국토계획인 풍수지리는 동리산문 혜철의 제자 도선에 의해서 완성을 본다. 그는 풍수지리 음양5행설 등을 연구하여 대보살의 구세도인의 법으로 활용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스님들이 백성들을 풍수해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바라기 탑을 짓고 백성들 스스로 재해에 대비할 것을 준비하도록, ‘비보(裨補)’라는 이름으로 조형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