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는 유난히도 혼돈의 시기였다. 그만큼 정체성이 없던 한해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정의가 사라진 한 해였다. 도대체 정의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는 했던 한해였던가. 그렇게 우리 사회를 풍미하던 정의라는 단어가 어디로 갔는가. 이 정도면 마이클 샌덜 교수가 쓴 책이 우리나라에서 그 짧은 시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사실과 반비례하여 그 실종 속도도 가히 신기록은 아니던가. 정의를 위해 사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 정의를 지키는가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두더라도 단순히 정의를 ‘사람이 지켜야할 올바른 도리’ 정도로 생각하여도 도처에 너무나 올바르지 못한 일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름조차 부르기도 죄송한 마음에 아직도 노란 리본을 못 떼고 있는 우리들에게 세월호 참극은 개인의 무책임은 물론 난국을 대처하는 국가라는 조직의 무능을 드러낸 채 아직도 여전히 표류하고 있으며 기껏 특정 개인의 죽음을 정점으로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식의 사건 종료 선언을 하기엔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이 많고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데 언제까지 무거운 업보로 끌고 갈 작정인지 걱정이 태산이고 실망은 더 태산일 뿐이다. 국가에 대한 신뢰는 계속 깨져 가고 가슴의 응어리는 아직 풀릴 기미도 없는데 그리고 우리가 내 배 하나 채우기 급급해하는 속물들도 의당 아닐진대 생뚱맞게 경제나 먹고사는 이야기로 여론전환이나 하면서 뒷걸음치는 모습을 보인다면 막장도 이런 막장은 없다. 책임 소재가 분명치 않은 정의의 오류인 셈이다.
힘없는 자들의 외침과 권리장전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한데 여전한 갑질이나 수퍼갑의 횡포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그야말로 지위고하와 남녀를 불문하고 전방위적 전지전능함을 보여준 한해이기도 하였다. 돈 있는 자의 습성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도 어느 정도지 몇 백 명의 소중한 시간을 자기 회사 직원 훈계를 빌미로 퉁쳐버릴 정도의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집에서 하는 행동과 회사에서 해야 할 처신 그리고 이 사회에서 행해야 할 미덕들을 아무 생각 없이 단순 합체해버리는 사고방식은 이미 개인의 몰상식을 넘어 사회적 부조리이자 정의의 저 편에 있는 만용일 뿐이었다.
그들만이 아니다. 고위공직자 계층들이 자체결정권 부재를 핑계 삼아 돌보라는 국민보다는 자신의 안위에 급급했음은 세월호 참극을 통해 우리에게 처절하게 생중계되었으며 자체결정권이 없다던 그들이 방위산업 비리 등을 통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몇 백억을 주무르는 사건은 정말로 이들이 자기 결정권이 없는 미약한 존재인가를 되묻게 하는 아이러니이기도 하였다. 확인되지도 않고 확인 할 수도 없는 소통의 장막 저편에서는 그들만의 리그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짜라시 몇 장 때문에 입에 담기도 싫은 험한 단어들이 서로를 겨루는 칼이 되어 정쟁의 암운을 드리우고 있는 것도 역시 옳지는 않다. 권력이라는 것을 유지의 철학보다는 베품의 미학으로 접근하는 것이 정의롭기 때문이다. 아무리 법을 만들어 제지한다 해도 소나기만 피하면 그 뿐일 뿐 무한한 탄성복원력으로 다시금 무슨무슨 마피아들이 여전히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할 것이 너무 쉽게 예견되기 때문에 이 또한 정의롭지 못하다. 민주주의적 숫자도 아닌 것 같고 전체주의적 숫자도 아닌 애매한 8대1이라는 스코어는 아무리 지지하지 않는 미운 오리털 정당이라 해도 지지나 혐오를 넘어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이리도 다양성이 피폐한 곳인가라는 의심과 함께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한다.
학계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양식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사회에 나가서도 번듯한 직장 하나 잡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치졸하게 성희롱이나 하면서 이 험한 세상에 나가기도 전에 기를 꺾고 있으니 가장 정의에 가까워야 할 존재들이 해도 해도 참으로 너무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우리 건축계라고 별반 다를 건 없다. 여전히 수많은 건축 관련 학회와 협회들이 섞이고 융화하기보다는 각자 영역 싸움에 그 총명한 재능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건축인의 실추된 위상을 높여준답시고 제정된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 같은 일련의 보호막은 오히려 징징거리는 어린아이에게 막대사탕 하나 물려주는 알량한 선심을 넘지 못하면서 문화와 경제 논리 사이를 힘겹게 진자운동하고 있을 뿐이다. 국건위나 지자체들도 건축의 위상을 높여주는 일련의 장치를 만들고 있으나 도대체 누구를 위한 몸짓인지 아직 알 도리가 없다. 주체만 있을 뿐 객체가 명시되지 않은 정의의 오류이다.
하긴 누구를 탓하겠는가. 우리네 건축인의 자존심입네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며 매각을 반대하던 공간사옥 하나 지켜내지 못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되는 일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우리를 보호 못하는데 그 누가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도 이미 신탁의 정의를 저버린 셈이다.
희망의 청(靑)마가 괜히 우리에게 다가와 여기저기 맞고 터지고 온몸이 시퍼렇게(靑) 멍든 지친 모습으로 쓸쓸히 지나가고 있다. 만신창이가 된 청마를 보내면서 다가올 해의 희망을 노래하기가 여간 두려운 게 아니다. 정의를 논하기엔 더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