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주사지동삼층석탑(국립문화재연구소)

우리나라 최초의 선문인 남원 실상사와 장흥 보림사는 유가계의 전통을 따라 평지 가람에 2개의 3층 석탑을 세웠는데 탑을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반면에 가장 큰 선문으로 발전한 강릉의 굴산사에는 탑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보령의 성주사에는 3층 석탑이 3개가 있다. 하나는 금당 앞에 있음으로 석가탑임을 알겠고, 2개는 뒤쪽 강당 양쪽에 있어서 조사의 부도를 석가의 탑과 거의 동격으로 올려놓고 있음을 본다. 가람은 비록 산골짜기이지만 평지에 배치하고 있다.

반면 화순 쌍봉사는(현욱의 봉림산문) 비록 좁지만 평지에 가람을 배치하고 있으며 지금 대웅전으로 편액한 단칸 3층인 목탑이 있다. 아마도 원래는 5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비좁은 가람의 크기로 미루어 본래부터 3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제 때 고치면서 도면 1장이 남아 있지만, 우리나라에 단지 2개 밖에 없던 목탑이 신도의 실수로 불이 나 버려서 이제는 그것이 3층이었는지 혹은 5층이었는지 조차 알 길이 없게 되었다. 다만 추측의 노력만 남았을 따름이다.

한편 옥천어산파로 알려진, 혜조 慧照(혜공왕10년 774∼문성왕 12년 850)는 중국 소림사에서 수계하고 신라 도의를 만나 함께 참학했으며 남악(지리산)의 승지에 창사하여 옥천사라고 했다. 탑과 銘(비석)을 짓지 말 것을 유촉했으나 신라 정강왕은 진감선사 대공영탑이라 추증하고 절 이름도 쌍계사라고 고쳤다. 가람은 화엄종의 예에 따라 경사진 구릉에 배치하고 있으며 승탑은 본래 가람 뒤쪽에 배치되는 것이 원칙인데 여기서는 대웅전 앞 중앙에 놓고 있다. 금당 앞에는 부처님의 탑만 두는 것이 원칙인데 여기서는 조사(승탑)를 부처님과 동격의 반열에 올려 세운 것이다. 도의는 가지산문이므로 쌍 탑을 세워야 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도 세우지 않고 대신 승탑을 놓고 있는 것이다.

혜철계통의 동리산문은 곡성 태안사에 개당했으며 도선을 제자로 둠으로서 유명한 산문으로 발전했다. 태안사에는 3층 석탑이 하나 있으나 어디서 옮겨온 것인 듯 제 자리가 아니며, 도선의 옥룡사에는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석관에 묻은 듯 부도전(집)을 두고 있다.(얼마 전 발굴로 밝혀졌다)

▲ 옥룡사 부도전 지-도선국사 석관과 석곽(문화재청)

강릉의 사굴산문이 가장 큰 것은 순천 송광사의 창건주 지눌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눌과 대립각을 세웠던 일연스님은 경상도에서 활동하면서 울주군 상북면 청도에 운문사를 창건하고 뒷산을 가지산이라고 고쳐 불렀다. 여기에는 가지산의 석남사, 산불산의 간월사, 영취산의 통도사 등의 신라 명찰이 들어앉아 있다. 고려 말 구산선문이 모두 쇠운에 빠졌는데 가지산문의 태고화상이 왕사로 있으면서 1356년 구산문을 통합하여 일가를 이루었므로 가지산문이 두 번째로 큰 선문이 되었다.

▲ 청도 운문사 쌍탑(문화재청)

이와 같이 구산선문은 자신들의 철학도 일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람 조형도 통일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구산선문 모두가 연원이 중국 조계 혜능의 제자였음으로, 고려 때는 이를 조계종으로 통칭하기도 했었는데, 왜 이들은 구산선문으로 나뉘어 다툼을 했을까? 당시의 선종은 교종에 비해 훨씬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현학적인 경전에 매이지 않고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고,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적 수행을 버리고 앞장서서 산골로 들어가서 개간을 일구고 몸소 일을 하면서 청정한 계율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보수는 가진 것을 더 가지려고 서로 다투며, 진보는 이념을 너무 따지다 분열해서 망한다고 하더니, 딱 그 꼴이었다. 필경 불교계는 통합과 분열을 거듭하며 조선조의 통불교라는 묘한 교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다음에 각 종파 간 석탑의 모양새가 다름을 논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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