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혼란하여 훌륭한 임금인 전륜성왕이 요구될 때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을 복판에 우뚝 세우고 주변에 3금당을 놓는다. 불법의 상징인 3장, 곧 율·경·논이다. 사람의 가치 기준을 일매지게 만든 것이 계율이고 부처님이 우주 생사 이치를 설명한 것이 경이며 이를 정리하여 해설한 논문이 논이다. 다음은 불법승 삼보인 탑, 금당, 강당을 일직선 축에 놓는 방식이 유행한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삼론학 계통인데 삼국시대에 들어왔다. 삼국시대 말에는 유식학이 들어오는데 이들은 3층 쌍탑의 조형방식을 쓰고 법을 상징하는 금당을 맨 가운데에 둔다. 백성을 다스리는데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고 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는 피타고라스 기하학이 원리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가람이나 탑의 계획이 정확한 콤파스의 비례치에 따랐다. 다음 통일신라는 가치관의 혼돈을 가져왔다. 작은 것 안에 큰 것이 들어가기도 한다. 의상계 화엄은 부처를 상징하는 탑을 없애 버리는데 반해 원효계는 5층 단탑으로 장엄한 세계를 그린다. 다음이 9산선문인데 서로 다른 조형 의지를 보이고 있다. 쌍탑식, 무탑식, 단탑식 등등... 이를 다음에 차례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 개산한 이는 신라 흥덕왕(826~836) 때의 홍척(洪陟)으로, 중국 남종선의 홍주종(중국에서 가장 유행했음) 마조도일의 문하인 서당지장에게 심인을 받고 귀국한 유학승이다.(마조도일은 백장청규를 지은 백장회해의 스승이고 유명한 소림사의 조사이다) 홍척은 가지산문의 초조 도의보다 약간 늦게 중국에서 돌아왔지만 지리산(남원)에 실상사를 개창(흥덕왕 3년)한 것은 선문 최초이다. 이를 두고 ‘북산의 남악(北山義 南岳)<금강산에 도의 지리산의 홍척>’이라고도 한다.

▲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 실상사 석장승

실상사는 지리산 자락 너른 분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가람을 산기슭에 의지하지 않고 평평한 들판에 자리하고 있어서 교종과 같은 집터잡기 법을 보인다. 동구에는 눈 불뚝이 멋진 돌장승을 세우고 (시대는 조선 중기로 떨어진다) 개울을 건너 사역으로 들어온다. 가람은 완전 평지에 가지산문의 보림사와 마찬가지로 1개의 석등과 2개의 3층 석탑을 세우고 있다. 석등은 석탑을 위해서가 아니고 금당에 경배하기 위해서 세웠는데 대단히 화려하다. 반면 석탑은 유가계 석탑처럼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으나 불국사 석가탑보다는 둔중하다. 장흥 보림사와 제작 시기는 비슷하지만 장식을 배제하고 있으며 탑 꼭지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상륜부가 유명하다. 사찰이 평지에 배치하는 것은 교종의 방식이고 탑이 2개인 것은 유가계(법상종)인데 석등을 대단히 화려하게 꾸민 점은 전혀 다르다. 말하자면 선종이 이 땅에 정착해 가면서 새로운 조형 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9산선문 가운데 남한에 있는 8산이 모두 홍주종(소림사)인데 유독 이 두 산문

▲ 보물 제35호 실상사 석등

만 평지에 쌍탑을 쓰는 조형법식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들은 모두 처음으로 선법(홍주종)을 전한 분들인데 비록 도의가 먼저 돌아왔지만 개산은 실상산문에서 최초로 했으며, 두 사람 모두 서장지장의 법을 전수하고 있다.

도의는 중국에 가서 먼저 오대산의 문수를 찾은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화엄종 스님인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체증은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탐방하였으나 서당지장과 백장회해의 법을 이은 도의의 법에 더할 게 없어서 돌아 온 분이다. 홍척은 왕(흥덕왕)실의 부름에 응하여 시호를 증각, 탑호를 ‘응적’이라고 받았으며 체증은 헌안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지만 왕명으로 가지산사에 이석케 하고, 시호를 보조, 탑호를 창성, 사액을 보림이라고 받았다.

또한 이들은 과거 신라 국경 지대의 백제 땅으로서 원효의 화엄 사상을 계승한 까닭은 아닐까... 원효 계의 화엄 사찰은 경주에 있는 황룡사와 분황사로서 모두 단탑식 가람이지만 원효계 화엄은 구례 화엄사에서 보듯 5층 석탑이며 선종과 결합했을 때 쌍탑으로 변화한다. 원효는 박학하여 저서가 많은데, 유가학에도 대가였음으로 초종이 없는 법상(유가)종에서도 원효를 흔히 초조로 하기도 하는데서, 실상산문과 가지산문이 개창을 하면서 조형원리로서 교종의 평지 배치와 유가학의 쌍탑 방식을 차용한 것이 아닐까...추론해 본다. 선종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므로 소의경전이 없어서 어쩌면 통일된 조형 방식이 없이 서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다른 종파와 달리 9산선문으로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상이란 통일되면 곧 분파하려고 하고, 분파되면 또 다시 통일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이 사실은 다음에 설명 된다)

실상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말사로서 백장암이 있다. 백장암은 이름으로 미루어, 금방 백장회해를 기리는 사역임을 알 수 있다. 양양 진전사지에도 도의의 부도 탑 주변에는 사역이 있고 굴산사에도 부도탑(오진) 주변에 지장선원이라는 별도의 사역이 있어서 알 수 있다. 백장암에는 국보 제10호인 석탑과 보물 제40호로 지정된 석등이 있는데, 조각이 대단히 사실적이어서 우리가 주로 당시의 난간이나 집의 구조를 연구할 때 참고하는 자료이다. 말하자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이런 실재의 집에 윤회의 주체인 영혼이 깃들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 보물 제40호 백장암 석등

그렇다면 백장회해를 찾아 봤다는 도의의 가지산문에는 백장의 사당이 없는데 서당지장의 심인만 받았다는 홍척의 실상산에는 백장의 부도를 세웠을까? 백장회해의 손제자 가운데 임제의현(?~867)이 있는데 이분이 임제종을 창시한 분으로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거대한 종파를 이루었다. 여기에 맥을 붙이기 위해서 백장회해를 끌어다 붙인 것은 아닐까? 선종에서는 경전을 쓰지 않으므로(不立文字) 법의 전승관계가(敎外別傳) 중요하기 때문이다.

▲ 중국 남종선의 형성과정(고익진, 한국고대 불교사상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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