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굴산사지 당간지주(문화재청)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번창한 산문은 (사)굴산산문으로, 개조는 통효범일이다. 신라 헌덕왕 2년(810년) 생이고 진성왕 3년(887년)에 입적했다. 할아버지가 명주도독으로 강릉 명주와 인연이 있었고 명주도독의 도움으로 이곳에 굴산사를 문성왕 9년((847년) 개산했다. 경문, 헌강, 진성왕이 국사로 모시고자 했으나 불응했다. 그만큼 지방 호족의 세력과 결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성여왕이 선, 교 양의(兩儀)에 대해 묻자, 석가모니까지도 설산에서 깨닫긴 했지만 극에 달하질 못해서 수십 개월을 돌아다닌 끝에 조사 진귀(眞歸)대사를 만나서 오묘한 뜻을 얻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이 말은 독창적인 것으로 중국 선종에서조차 이렇게까지 말한 사람은 없다>

그가 개산한 굴산사는 산자수려한 명주군(지금은 강릉시)에 있는데 해안에서 떨어진 분지안의 평지에 있다. 덩그마니 가공을 전혀 하지 않은 커다란 당간지주만이 둔덕 위에 자리할 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북쪽 산자락에 범일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만 있는데, 얼마 전 홍수에 일부 유실되어 발굴을 해본 결과 이쪽에 절터가 일부 발견되었다.

이 절은 고려의 몽고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이후 조성된 주변의 부처님을 보더라도 원래부터 탑은 조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석가도 부정하고 있는 그의 사상으로 미루어 석탑을 과감하게 없앴을 것이며 거대한 당간지주도 전혀 가공하지 않고 세웠을 것이다. 그는 국사도 거부했으므로 당대에 부도를 조성하지 못하고 고려 때 와서야 후손들이 그를 국사로 추대하고 승탑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선종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사법 전승을 기록한 비조차 세우지 않은 점이 그의 교학(言敎)를 부정하는 사상과 일맥상통 한다고 할 수 있다.

▲ 굴산사지 석불좌상(문화재청)

이렇게 전등이 끊긴 굴산산문이 가장 번창한 것은 어인 까닭인가? 우리나라 ‘선종의 중조’라고 할 수 있는 송광사의 지눌이 굴산산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송광사에도 탑이 세워지지 않았다. 피안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놓이고 대문을 거쳐, 중문을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에 대웅전이 있고 뒤쪽에 강당에 해당하는 승보전이 있다. 대지가 비교적 평탄하면서도 몇 개의 단을 두는 것이 화엄종하고 유사하며 업경을 두고 피안으로 건너가는 설정은 법상종(유가계)의 모습을 닮았다.

▲ 천왕문 전경과 배면(문화재청, 송광사 중요목조건축물 정밀실측보고서, 2007)
▲ 송광사 대웅보전 전경과 주변 전각들(문화재청, 송광사 중요목조건축물 정밀실측보고서, 2007)
▲ 우화각 북쪽 전경(문화재청, 송광사 중요목조건축물 정밀 실측보고서, 2007)

선종은 일체의 말과 가르침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화엄과 대립한다. 그러면서도 근본원리는 화엄과 통한다. 근본 원리는 교리를 통해 정립되는 것이므로 선은 화엄을 떠나 존립할 수 없다. 민중은 선처럼 “추상적이고 현실적인 세계관”만으로는 살 수 없다. 각박한 현실에서 괴로워하는 그들에게 “구체적인 형상으로 화려하게 장엄된 이상 세계” 요구된다. 따라서 선과 화엄은 극도로 상호 배제적이면서도 불가분의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다.(고익진/불교사상사/동국대학교/1989) 지눌 역시 가부좌만 틀고 앉아 있으면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화엄학을 공부할 것을 권한다. 선종은 화엄의 현학적이고 사제(司祭)적인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지 그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굴산산파는 전체적으로 화엄의 배치 방식을 따르면서도 모든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한다. 의상계 화엄이 탑을 세우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탑을 두지 않는 반면, 모든 전각은 몇 개의 단(보통은 10단)을 조성하여 위계를 만든다. 그러나 그 위계는 화엄종에서처럼 엄격하지 않다. 이것이 조선초 선교 양종으로만 나뉘면서 조선조의 무탑식 마당 중심의 사찰 배치 방식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산선문이 굴산산문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그런데 왜 지눌의 후손은 자신들의 조사인 굴산산문을 중창하지 않았을까? 다음에 이야기 하겠지만 가지산문의 일연스님이 부석사 중창에 열심이었던 것과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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