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초(7∼8세기) 화엄종이 유행을 할 때, 거의 함께 등장해서 세력을 떨쳤던 종파는 밀교(密敎)이다. 그러나 밀교는 우리나라 사회의 마이너리티로서 항상 탄압을 받았으며 민중불교로 치부되어 사회 전면에 나서지 못했음으로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화엄 다음으로 사회를 도탄에서 구하고자 했던 구산선문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일부 통일을 하고 당을 물리친 신라에게 잠시지만, 오랫동안의 전쟁을 잊고 평화의 시간이 찾아왔다.

▲ 구산선문 지도 - 아홉 가운데 8개가 남쪽에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그러나 인구는 증가하는데 경작지가 한정되어, 식량 생산은 늘어나지 않고 귀족들의 가렴주구는 점점 심해지는데, 불교의 기복을 비는 의례는 도를 지나쳐 갔다. 이에 대항해서 일어난 세력이, 중국에서 양자강 주변 조계 혜능의 남종선을 유학하고 돌아온 유학승들이었다. 이들은 ‘화전(火田)’이라는 새로운 농법을 제시하면서, 자진해서 아직까지 개척되지 않은 산골짜기 분지로 농민들을 이끌고 들어갔다. 유가와 화엄이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호국을 기본이념으로 했다면, 선문(禪門)은 백성 보호를 기본 이념으로 했으며 이를 뒷받침한 세력은 중앙의 왕권에 맞서는 지방의 호족들이었다.

구산선문 가운데 두 번째로 일어난 이가 가지산문의 개조, 보조국사 체징(804∼880)이다. 그는 염거(廉居)화상에게 선을 닦고, 중국을 두루 다니며 큰스님을 찾았으나 그의 조사(祖師) 도의(道義)의 법보다 더 배울 게 없어서 돌아왔다. 장흥 유치의 가지산 자락에 보림사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크게 떨쳐서 그가 3대 조사로 가지산문을 개산했다. 이것은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를 본뜬 것으로 3대 ‘보림’이라고 자부했다. 보조국사는 861(경문왕 1년)년에 보림사를 중창했는데 그에게는 8백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자신이 종조가 되지 않고 3대 조사로 물러났을까? 아마도 홍척국사가 이웃 남원 실상사에서 개산한 실상산문을 의식하지 않았을까?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 적조탑비에 의하면, 그(홍척)가 당나라에서 법을 전해 온 것은 도의보다 늦지만 절을 짓고 문파를 이룬 것은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라 한데서 알 수 있다.

종조 도의(생몰 년대 미상)는 784년(선덕왕 5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백장회해에게서 법요를 받고 821년(헌덕왕 13년)에 귀국하여 선(무위법)을 일으키려 했으나, 때가 되지 않아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했다. 백장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분으로, 백성들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화전으로 밭을 일구어, 백성의 식량을 편안(安養)하게 했다. 백장청규를 짓고 신자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덜 먹었으니, 어느 틈에 좌선을 하고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걷거나 서거나 앉아서 일하면서도, 참선을 하여 깨우치는 것이 목표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그러니 도의가 활약했던 9세기 초에는 아직 백성이 굶주리지 않았고, 특히 강원도 양양은 변방으로서 백성들의 숫자도 많지 않았으며 지방의 호족들도 그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9세기 후반에는 사정이 전혀 달라졌으며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백성들의 기아를 해결하고 자기의 세력을 넓혀 가려고 하는 호족들의 이해가 구산선문의 교리와 맞아 떨어졌을 것이다.

그럼 진전사지의 가람 배치를 살펴보자. 진전사에는 3층 석탑(국보 122호) 주변의 절터와 절터 동쪽 뒤의 도의선사 부도 주변 조그만 절터가 있다. 부도는 스님의 무덤이므로 사당이 자리하는 왼(동)쪽 뒤에 놓이는 게 일반적이다. 선종에서는 경전을 읽지 않는 대신 교외별전(敎外別傳/가름침 곧 경전 외에 별다르게 전해 내려오는 것)이므로 대대로 스승에 의한 상승관계가 중요시된다. 절터는 산비탈 높은 계단을 올라가서 조성되었다. 유가계에서는 높은 축대를 쌓고 영지나 개울을 건너가게 구성하지만, 여기서는 영지가 없고 단순히 높은 계단 위로 3층탑의 탑신부만 보이게 한다. 탑은 가람 중앙에 하나만 세우고 있어서 전형적인 화엄종의 가람 배치 방식을 따르고 있다. 3층탑은 2중 기단 위에 5개의 굽받침을 가진 3층의 옥게석을 올려서 전형적인 신라의 유가계 탑과 같은데, 다만 2층 기단 면석과 1층 탑신부에 8부중상과 부처님을 새겨서 장엄하고 있다. 바로 화엄종의 장엄 기법이다. 처음에는 이와 같이 선종 사찰이 화엄과 같은 형식을 택하고 있다.

▲ 진전사지 입구(네이버 백과사전)

반면에 보림사는 산골자기이지만 평지 가람에 쌍탑을 조성하며, 개울을 건너 피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계획한다. 탑은 2중 기단에 3층 옥게석, 5개의 굽받침, 일체의 조각이나 장엄이 없는 등 유가계 석탑과 형식이 아주 유사한데 처마가 약간 얇고 추녀 끝을 날카롭게 추켜세웠다. 또한 그 앞에 세운 석등이 2중의 옥게석을 받치고 있으며, 상대석, 하대석의 연화문 장식이 대단히 화려하게 새겨졌다. 제작 시기가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 앞 석등및 전경(중앙일보, 한국의 미-석등 부도비,1992)

개울을 건너 절집으로 들어가고 3층 석탑을 쌍으로 세운 것은 유가계를 모방하고 있으나, 절을 산간이면서도 너른 평지에 배치한 것은 유가계 이전의 율종이나 삼론종의 호국 사찰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스승 도의가 화엄의 아직은 교선 양립의 화엄종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면, 보조국사 체징은 선종을 교종과 맞서는 종파로 세우기 위해 새로운 격식을 찾아 낸 것으로 여겨진다.

장흥 유치는 한국동란에서 빨치산이 가장 오랫동안 칩거했던 곳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지금은 댐을 막아서 저수지가 되었는데 보림사에 국보 보물이 없었다면 아마도 여기까지 수몰이 되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산골자기에 절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스님이 공부를 하기 위해 도시의 번잡함을 피한 것이 아니고,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농법인 화전으로 산간의 개척지를 개간해 나갔던 까닭이다. 이와 같이 백성들과 아픔을 같이 한 것이, 조선조 척불시대에도 불교가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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